미국 북감리교회의 스크랜톤 여사가 1886년 5월 31일 정동 이 자리에 이화학당을 창립한 지 어언 100년입니다. 이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지고, 제 이름조차 지닐 수 없었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신교육이 시작되었으며, 폐쇄된 사회 속에 갇혀 살던 많은 이들에게 해방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가득한 사랑이었다고 믿습니다.
이화의 지난 100년이 한국의 현대사 특히 여성사에 남긴 눈부신 발자취는 스크랜톤 여사의 선구적 혜안, 헌신적 노력, 깊은 사랑의 결실로서, 그 분의 영전에 보여드려 자랑스러울 수 있음을 기뻐합니다. 이화의 100년은 그대로 이 나라의 근대 민족사, 여성 지성사였습니다. 주권을 잃은 민족의 운명과 맥을 같이하면서 선각적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던 개화기, 류관순 열사로 상징되는 3·1운동, 이화가 서울 학생 운동의 선구에 섰던 1930년대, 그리고 오늘날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는 탁월한 인재들의 산실이 되었던 1950년대 이후의 지금까지, 민족과 역사 앞에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왔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들이 다시 수많은 열매로 맺어지듯이 이화에서 길리운 성실한 여성 일꾼들이 한국이란 토양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그 소임을 다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이제 이화여고의 100년사는 조국의 풍상, 여성의 애환과 함께 한 성장의 과정, 기독교적 진리의 구현상, 여기서 자란 인재들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리하여 한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선인들의 믿음, 겨레를 위한 희생과 봉사, 숙명과도 같았던 남녀불평등의 벽을 넘었던 용기와 슬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던 창의와 협동의 구현상을 제시하고 증언하고자 합니다. 필생을 바쳐 헌신을 다하였던 교육 선배들의 노고와 지혜에 관한 이 증언이 새 세기에도 연면히 이어질 이화의 가족들뿐 아니라 사회의 유지들에게도 내면의 귀한 거울[鑑]이 되고 외면의 맑은 거울[鏡]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흘러간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는 일은 우리를 고루와 정체의 늪에 빠뜨리고 새로운 것에 대해 맹종하며 온고(溫故)를 저버림으로써 뿌리를 잃는 불안정만큼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이 책을 펴냄에 있어 무엇보다도 우리를 괴롭혔던 것은 사료의 인멸이었습니다.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창립 이래 고이 간직해 왔던 공적 문서들이 메인홀과 더불어 송두리째 잿더미로 화한 까닭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커다란 후유증을 앓았습니다. 취업하고자 하는 졸업생 또는 해외 유학을 하려는 졸업생에게 증명서를 발행하거나, 옛 친구들의 연고지를 알고자 하는 졸업생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 학교가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동창회의 명단은 각 기별 동창 모임을 통해 물어 물어 한 사람씩 작성해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태가 이럴진대 '지나온 경험', '확실함', '뚜렷함'을 지녀야 할 100년 간의 기록이 온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오랠지라도 항상 새로움을 지녀야 할 역사의 책무 앞에 오랜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기록조차 할 수 없는 사정이 두렵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1975년에 각고의 노력으로 유실된 부분의 상당량을 채워 간행한 이화 90년사가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더더욱 감사한 것은 1975년 소실된 푸라이홀의 폐허를 정지하면서 '사립이화학당요개'를 수거한 일입니다. 이는 오늘날 타임캡슐과 같은 의도로 1923년 푸라이홀 초석 밑에 묻어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밖에 새로이 얻은 사료 등을 통해 이화 90년사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이를 수정 보완하고 이후 10년사를 추가 기술하였습니다. 교명의 민비 하사설을 고종황제 하사로 바로잡은 것은 수정의 한 예입니다.
이화가족 여러분,
이제 삼가 두려움을 가지고 100년사를 엮어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 피와 땀을 바쳐 이화의 오늘의 영광을 이루신 선배님들의 고결한 자취에 부끄러운 잘못으로 누가 됨이 없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100년을 위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지금, 지난 이화인들의 자유와 사랑, 평화의 구현상을 담은 이 기록은 오늘과 내일의 이화인들에게 튼튼한 정신적 밑거름이 되어줄 것을 믿습니다.
끝으로 시간을 내시어 협동 작업에 열의를 다해주신 편찬위원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누구보다도 여러 해 동안을 온전히 사료의 정확성을 위한 힘든 작업과 직접 구성 집필을 전담해주신 정영무 선생님, 이 일에 큰 몫을 담당해 주신 조혁구 교감님, 신봉향 선생님, 안선희 동창님의 희생적인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드립니다.